LLM의 효능감 — 만들지 않던 것들을 만들게 되는 시대

25년 된 커널 드라이버를 되살린 이야기
최근 Dmitry Brant의 글 Using Claude Code to modernize a 25-year-old kernel driver를 읽었다. 1990년대 QIC-80 테이프 드라이브를 위한 ftape라는 Linux 커널 드라이버가 있었는데, 커널 2.4 이후로 25년간 방치되어 있었다. 저자는 Claude Code의 도움을 받아 이 드라이버를 최신 커널(6.8)에서 동작하도록 현대화했다.
흥미로운 건 이 작업의 성격이다. 커널 드라이버 마이그레이션은 오래된 API 교체, 빌드 시스템 변경, 하드웨어 디버깅을 모두 포함하는 고된 작업이다. 저자 스스로도 "직접 할 수 있었지만 수 주가 걸렸을 것"이라고 했다. 결국 Claude Code와 함께 며칠 만에 끝냈다.
이 글을 읽으면서 한 단어가 떠올랐다. 효능감.
LLM의 효능감이란
심리학에서 자기 효능감(self-efficacy)은 "내가 이것을 해낼 수 있다"는 믿음이다. LLM의 효능감은 조금 다르다. "이제는 이것도 만들어볼 수 있겠다"는 감각이다.
세상에는 꼭 필요하지만 아무도 만들지 않는 소프트웨어가 많다. 이유는 대개 비슷하다.
- 시간 대비 효용이 낮다. 쓰는 사람이 나 혼자이거나 극소수다.
- 귀찮다. 핵심 로직은 단순한데, 주변 boilerplate가 많다.
- 도메인 지식의 벽이 있다. 커널 드라이버, 시스템 프로그래밍, 특정 OS의 API 등을 새로 공부해야 한다.
이 세 가지가 겹치면, 아이디어가 있어도 실행에 옮기지 않게 된다. "나중에 시간 나면 해야지"라고 생각하다가 영원히 안 하게 되는 것들.
LLM은 이 방정식을 바꿔버린다. boilerplate는 LLM이 작성하고, 낯선 API 문서는 LLM이 읽어주고, 반복적인 디버깅 사이클은 LLM과 함께 돌린다. 내가 가진 도메인 지식과 아이디어에 LLM의 실행력이 더해지면, "귀찮아서 안 만들던 것"이 "만들어서 배포할 수 있는 것"으로 바뀐다.
내 경험: 작지만 필요한 앱들
비슷한 경험을 직접 하고 있다.
Karabiner 없이 한영키 전환
macOS에서 한영 전환을 커스터마이징하려면 대부분 Karabiner-Elements를 설치한다. 강력한 도구이지만, 단순히 한영키 하나 바꾸려고 설치하기엔 무겁다. 커널 extension을 로드하고, 설정 JSON을 작성해야 하고, 시스템 보안 설정도 건드려야 한다.
"Right Command 키 하나로 한영 전환하는 가벼운 앱"은 분명히 필요한데, 그걸 만들려면 macOS의 input source API, 키보드 이벤트 후킹, 앱 번들링까지 알아야 한다. 전형적인 "필요하지만 귀찮은" 작업이다.
LLM의 도움을 받으니 이야기가 달라진다. Swift로 뼈대를 잡고, CGEvent tap 설정하고, input source 전환 로직을 구현하는 과정에서, 내가 모르는 API의 사용법은 LLM이 안내해주고, 나는 동작 검증과 엣지 케이스 처리에 집중할 수 있었다.
마우스 휠 방향만 바꾸는 앱
macOS에서 트랙패드의 natural scrolling은 자연스럽지만, 외장 마우스를 연결하면 휠 방향이 반대가 된다. 시스템 설정에서 스크롤 방향을 바꾸면 트랙패드까지 영향을 받는다. "마우스 휠만 방향을 뒤집는 앱"이 필요한데, 역시 직접 만들기엔 귀찮았다.
이것도 마찬가지다. 핵심 아이디어는 단순하지만 (CGEvent tap으로 마우스 scroll 이벤트만 가로채서 방향 반전), 실제 구현에는 이벤트 필터링, 디바이스 구분, 권한 처리 등 잡다한 작업이 따른다. LLM과 함께하면 이런 작업이 몇 시간 안에 끝난다.
이게 왜 중요한가
이런 사례들의 공통점은 "소수를 위한 소프트웨어"라는 점이다.
25년 된 테이프 드라이브를 쓰는 사람, Karabiner 없이 한영키만 바꾸고 싶은 사람, 마우스 휠만 뒤집고 싶은 사람. 시장 논리로 보면 이런 소프트웨어는 만들어질 이유가 없다. 사용자가 너무 적다.
하지만 LLM이 개발 비용을 극적으로 낮추면서, "사용자가 적어서 만들 가치가 없다"는 판단 기준 자체가 바뀌고 있다. 이제는 혼자 쓸 앱이라도 만들 수 있고, 만들었으면 배포도 할 수 있다. 그리고 나와 같은 불편을 겪는 소수의 사람들에게 실질적인 도움이 된다.
이것이 내가 말하는 LLM의 효능감이다. 거창한 AI 혁명이 아니라, "귀찮아서 안 만들던 걸 이제는 만든다"는 조용한 변화. 그리고 이 변화가 쌓이면, 세상에는 지금보다 훨씬 더 많은 "작지만 유용한 소프트웨어"가 존재하게 될 것이다.